Artist Statement
모호한 인간관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더 넓고 큰 인간관계를 필연적으로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인간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이지만 그만큼 어려움과 고통이 수반된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건강한 내면의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간관계에서의 거리 두기를 연구하고 각자마다의 건강한 선을 작품에서 표현한다. 일상 또는 여행을 통해서 마주한 인물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재편집하여 군중(crowd)을 이룬다. 그리고 선을 통해 저마다의 거리와 그들의 관계를 표현한다.
<군중Ⅲ>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초점이 맞지 않은 듯 모호하고 애매한 경계로 드러낸다. 이는 대상을 자세히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상징한다. 그리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 혹은 멀리서만 지켜보고 싶은 심리를 흐릿한 경계로 표현한다. 이러한 모호한 경계는 거리 두기 작품의 시작이었던 안경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안경 쓴 여자에 대한 무례한 태도를 겪으며 안경을 벗게 되었고 벗으면 보이지 않으니 불편할 거라 여겨왔던 것들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려 애쓰지 않으니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눈치 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작품 속에서 인간관계에 대입하여 군중과 모호한 경계를 통해 표현한다. 서로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일상을 사는 군중에게 본인을 투사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제3의 시선에서 내적 거리감을 보여준다.
인간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하며 중요하다. 하지만 이 필수적인 인간관계가 늘 원활하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 만나는 사람들이 다양해진 만큼 많은 감정들이 존재한다. 깊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사람들은 감정이나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고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한 교류들이 더 깊은 친밀함을 갖게 하지만 친밀함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가까운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상처 없이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할까?
여기서 나는 좀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상대방과의 상처 주지도, 받지도 않을 일정한 심리적 거리 두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에게 심리적 거리 두기란 나와 타인의 사이에 침범할 수 없는 선이다. 즉, 서로에게 적정한 심리적인 안전지대를 말한다. 각자마다의 안전지대의 범위와 규모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고정적이지 않고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같은 사람이라도 교류하는 상대방과의 친밀도에 따라 거리 두기의 범위는 확장 또는 축소되기도 한다. 일정한 거리 두기는 작품에서 선으로 표현되는데 선은 각자마다의 내밀한 경계선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과 마음 사이의 한계나 허용범위를 표현할 때 ‘선을 긋다.’ 또는 ‘선을 넘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관용구를 빌려 저마다의 건강한 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품에서 선은 시각적인 실선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군중 무리로 선을 표현하기도 하고 이어 붙어진 캔버스 사이의 간극이 선이 되기도 하고 우산이 선이 되기도 하며 도로 위 차선이 선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선을 표현하며 심리적 거리 두기를 상징하는 선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모두 모양새는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업의 시작은 나의 사소한 안경 콤플렉스에서 점차 개인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확장되었다. 작품을 진행하며 관계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할수록 인간은 인간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끊임없이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회피하며 외면하고자 벗어왔던 안경은 거리 두기로 심화되어 선이라는 매개체로 화면에 나타났다.
이번 갤러리현에서 열린 <Boundary>展을 통해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과 힘듦을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심리적 거리 두기를 제안하고 작품을 통해 내적인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모든 이들이 심리적 거리 두기를 통해 현대인들이 인간관계에서 겪는 갈등을 해소하고 보다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작가로서 나는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지속하며 보다 더 나은 인간관계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던지며 작품을 통해 답할 것이다.